㎽그 여자(女子) – 윤동주 ⑤ 혁광㉠

혁광
1.
황실의 종친
혁광은 만주 양람기1) 사람으로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이고, 자는 보정(輔廷)이다.
건륭(乾隆)제 홍력의 17째 아들인 영린(永璘)의 손자이고, 보국공(輔國公) 면성(綿性)의 장자이다.
황실의 종친으로서 도광(道光) 30년(1850)에 보국장군(輔國將軍) 직함을 세습 받았고, 함풍(咸豐) 2년(1852)에 패자2)로 봉해졌다.
그리고 함풍 10년(1860)에 패륵이 되었고, 동치(同治) 11년(1872)에 동치제의 결혼식 때에 군왕(郡王), 어전대신(御前大臣)으로 임명되었다.
광서(光緒) 10년(1884)에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 각국 사무관 총 관리직), 경군왕(慶郡王)이 되었다.
그 후에 내정행주(內廷行走), 우종정(右宗正)을 거쳐 경친왕(慶親王)으로 봉해졌다.

혁광의 초상화

2.
조정의 내각 업무를 맡다
광서 26년(1900) 8개국 연합군3)이 베이징을 침략한 경자사변 중에 경성에 남아 이홍장과 더불어 각국과의 화의(議和)를 추진했다.
1903년에 군기대신(軍機大臣)이 되었고, 1911년에 초대 총리대신이 되어 경친왕 내각을 조직했다.
우창 봉기4) 후에는 원세개의 요청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고, 필덕원(弼德院,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 총재를 지냈다.
뒤에 원세개의 권유에 따라 융유태후에게 청 황제 양위를 찬성하도록 하였다.
중화민국이 들어선 후에 아들 재진이 거금을 들여 톈진(天津) 영국 조계(치외법권지역)로 이주했다가, 뒤에 다시 베이징 서성구(西城區) 정부가(定阜街) 3호(號) 경왕부(慶王府)로 돌아왔다.
1917년 1월 28일, 부중(府中, 중앙 관청이 있는 곳)에서 병사했다.청말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경밀칭왕(慶密親王)으로 추증했고, 민국 대총통 여원홍의 명령에 따라 그 아들 재진이 경친왕 작위를 계승하게 하였다.혁광의 아들 재진 초상화

그 여자(女子) – 윤동주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는 손님이 집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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